한글 2007의 기본글꼴은 바탕체이다.
요즘은 가독성이 뛰어난 좋은 글꼴들이 많이 나와서 바탕체를 그대로 쓰는 경우는 드물다.

한글 기본 글꼴을 맑은 고딕으로 변경해 보자.




한글 문서를 열게 되면 기본 글꼴이 '바탕'으로 설정되어 있다.




한글 문서의 기본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파일이 'Normal.hwt' 파일이다. 
윈도우 탐색기의 파일찾기 'Ctrl + F'를 누르고, 파일명에 "Normal.hwt'파일을 검색하면 2종류의 파일이 검색된다.
'Kor'디렉토리에 있는 'Normal.hwt'를 더블클릭해서 파일을 연다.  



Normal.hwt를 열고 글꼴을 변경하고자 하는 글꼴(여기서는 '맑은 고딕')로 변경하고 문서를 저장하면 된다.




<표에 맑은 글꼴을 기본글꼴로 설정하기> 

대표 글꼴을 맑은 글꼴로 변경하더라도 표를 만들게 되면 기본글꼴이 맑은 글꼴로 변경되지 않는다.
이럴때는 스타일을 이용해 글꼴을 등록해 주면 된다.



한글의 모양 탭으로 이동해서 스타일(단축키 F6)를 눌러서 스타일 설정화면으로 이동한다.




스타일 탭을 클릭하여 팝업 화면의 '바탕글'을 클릭, 아래 편집 버튼을 클릭한다.



편집화면으로 이동해 '글자모양'을 클릭한다.



편집화면을 클릭한뒤, 글꼴을 '맑은 고딕'으로 변경한 수 설정을 클릭한다.



스타일 편집창으로 나와 다시 설정을 클릭한다.



다시 스타일 창으로 나와서 아래에 중앙에 있는 스타일 내보내기를 클릭한다.



스타일 내보내기 창에서 왼쪽의 바탕글을 클릭하고 아래쪽은 버튼을 눌러서 'Normal'을 클릭하고 닫기를 누른다.



위와 같은 팝업창이 뜨면 '덮어씀'을 클릭한다.


 

마지막으로 스타일을 저장할까요? 물으면 '저장'을 클릭한다.

한글을 닫고, 다시 열게 되면, 기본 글꼴과 표 안의 기본글꼴이 '맑은 고딕'으로 변경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글꼴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등록하게 되면 한글의 기본글꼴과 표 안의 글꼴의 기본값을 변경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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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최고의 워드 프로세서 한글.
우리나라만 빼고는 전 세계적으로 엑셀이나 워드가 대세이기 때문에, 답답한 쪽에서 우물판다도 한글과 컴퓨터 측에서 엑셀과의 데이터 호완성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글에서 표 작업할 때 여러가지 오류나 불편한 점으로 인해 엑셀에서 표를 가져다가 붙여넣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한글에서 엑셀로, 엑셀에서 한글로의 붙여넣기는 가끔식 뜻하지 않은 오류가 발생해 많은 유저들을 당황케 하고 있다. 그중에 특히 사용자들을 당황케하는 몇가지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엑셀 표를 한글에 붙여넣기 하면 아래처럼 글자가 위로 붙어 버리는 문제점이다.

<아래는 엑셀의 표를 한글에 붙여넣기 한 예이다.>

 

위 엑셀의 표를 한글로 붙여넣게 되면 아래와 같이 된다.



대부분의 사용자가 이러한 사용상 불편의 이유로 엑셀을 잘 사용하지 않던지, 그냥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글자 위치의 세로 정렬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래를 보고 천천히 따라하면 두 번 다시 이런 불편으로 인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 표의 '세로 중앙정렬' 하는 방법


 

<첫 번째 방법>


1.  표 전체를 마우스로 드래그 하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서 '표/셀 속성(Q)'를 클릭한다.


2. 표/셀 속성에서 마지막에 있는 '셀'탭을 클릭하고, 중앙에 잇는 세로정렬 중 가운데를 클릭하면 된다. 






<두 번째 방법>


첫 번째 방법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방식이지만, 아래 두 번째 방법이 제일 간단하다.
한글 편집화면의 도구막대 중 표 막대에 보면 아래와 같이 정렬방식이라는 아이콘이 자동 생성되어 있다.정렬방식을 클릭하면 하위 메뉴에 위,아래,좌,우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정렬할 수 있도록 버튼으로 되어 있다. 9개 버튼 중에서 중간에 것을 선택하면 바로 가로, 세로 가운데 정렬을 한번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아래처럼 간단하게 정리된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간단한 두 가지 방법만 알고 있으면,
인터넷이나 엑셀의 표를 한글에 붙여넣기 할 때 가볍게 붙여넣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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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샵의 커브 단축키인 Ctrl + M 키가 않 먹히는 경우가 있다.

포토샵에서 커브(Curve)의 역할은 콘트라스트와 색감을 조절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인데,

단축키(Ctrl + M)이 먹히지 않을 때 메뉴바를 찾아 마우스로 클릭하는 것은 굉장히 답답한 일이다.


'Ctrl + M' 단축키가 먹히지 않는 이유는 원인은 포토샵 프로그램의 설치 에러가 아니라,

마이크로 소프트에서 제공하는 'Bing' 바(Bar)와의 충돌 때문이다.


제일 간단한 해결책은 제어판의 '프로그램 설치/제거'에 들어가 'Bing Bar'를 삭제해주면 단축키가 복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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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샵 파일(PSD), 일러스트파일(AI)파일 미리보기

PSD파일과 AI파일은 탐색기에서 아이콘만 뜨지 미리 보여지지 않습니다.

간단한 패치 프로그램을 깔아주기만 하면 탐색기에서도 그림파일처럼 바로 보여지게 됩니다.

아주 유용한 프로그램이니 파일 받아 압축풀어 실행만 해 주시면 됩니다.

용량도 아주 작고 금방 설치되네요^^


 
Photoshop 7까지는 윈도우 탐색기에서 .psd 파일의 미리보기가 가능했는데

Photoshop CS 이후로는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매번 포토샵을 실행해서 .psd 파일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 비능률적이라는 생각에 검색을 해보니 방법이 있었다.

윈도우 비스타에 포토샵 CS3를 설치한 상태인데 이미지처럼 psd 파일의 미리보기가 가능하다.


 

위 압푹 파일을 다운 받은 후 압축을 풀고 psicon.dll 파일을

C:\Program Files\Common Files\Adobe\Shell 에 복사한 후

psicon.dll.reg 레지스트리 파일을 시스템 레지스트리에 병합을 해주면 된다.

reg 파일을 더블 클릭하거나 마우스 오른 클릭 후 병합을 선택하면 레지스트리에 병합할 수 있다.

Shell 폴더가 없다면 새로 만들어면 된다.

그리고 압푹 파일에 보면 aiicon.dll 파일과 aiicon.dll.reg 파일이 있는데

 .ai 파일의 미리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파일이다.

사용해보진 않아서 잘 되는지는 확인을 못했다.

readme.txt 파일을 보면 자세한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다.

 


출처 : Tong - Mighty Warrior님의 포토샵 배우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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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스탠포트 대학교 졸업식 연설문

 
이 연설문은 스티브잡스가 2005년 미국의 명문대학인 스탠포트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근대 최고의 연설문 중 하나로 평가될 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짧지만 강렬한 그의 메시지에 수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지금 그 감동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연설문 전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세계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오늘 이 자리만큼 대학졸업식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오늘은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그뿐입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들려 드릴 첫 번째 이야기는 점 잇기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자퇴를 했으나

일년 반 정도 청강생활을 하면서 머물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그렇다면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이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생모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미혼모였는데,

저를 양자로 보낼 결심을 하셨죠.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어머니께서는 제가 대졸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 부부가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이 부부는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셨죠.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입니다." 였습니다.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나중에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양부모님께서 저를 꼭 대학에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친 어머님은 마음이 누그러지셨죠.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로부터 17년 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 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 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

하레 크리슈나 the Hare Krishna 사원(역주: 힌두교 계열)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I loved it.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는 거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운명),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제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운 좋게도 저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 나이 스무 살에 워즈 Woz와 같이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안에 애플은 사천 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짜리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창사 이래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전년도에 출시했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And then I got fired.

그리고 저는 해고를 당했죠.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스스로 창업한 회사로부터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애플의 규모가 점점 커감에 따라 저와 함께 회사를 운영해 나갈 재능이

걸출하다고 생각한 사람을 영입했고, 한 해 정도는 잘 굴러 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러다가 회사의 장래에 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화로 번졌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그런데 이때, 회사의 이사진들은 그 사람 편을 들었죠.

 

So at 30 I was out.

그래서 나이 서른에 쫓겨 났던 겁니다.

 

And very publicly out.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말입니다.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제 인생의 초점이 사라졌고, 그것은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제 쪽으로 오던 바톤을 놓친 것처럼 한 세대 전의 기업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빗 패커드(역주; 휴렛 패커드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역주; 인텔의 공동 창업자)를 만났고 볼쌍 사나운 제 실패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아주 공공연한 실패작이라 차라리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그러나, 무엇인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애플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 사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축출당했지만, 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 당한 사건은 돌아 보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고의 사건으로 판명되었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성공이라는 무거움을 벗고, 확신은 전보다 줄었지만,

다시 처음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임했습니다.

 

It freed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of my life.

해방된 기분을만끽하며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그로부터 5년간, NeXT, 그리고 Pixar를 창업했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자와 사랑에 빠졌죠.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Toy Story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놀라운 반전으로 애플은 NeXT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 왔고,

NeXT에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핵심입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그것은 지독하게 입에 쓴 약이었지만, 그 환자는 그 약이 필요했나 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때로 삶은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칩니다.

 

Don't lose faith.

신념을 버리지 마세요.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제가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임을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이 일도 그런거죠.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자신이 하는 일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진정한 만족을 얻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훌륭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 보세요.

 

Don't settle.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찾았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인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위대한 사랑처럼,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그러니, 그 일을 찾을 때까지 계속 탐색을 하십시오.

 

Don't settle.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열 일곱 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지막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옳은 길로 들어 설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저는 그로부터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요." 라는 대답이 계속 나온다면, 무엇인가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곧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제가 인생의 중대 결정을 내릴 때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심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밑으로 가라 앉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잃어버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당신은 이미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일년 전쯤에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30반에 CT 촬영을 했는데, 췌장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이 암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길어야 석 달에서 여섯 달이라고 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에 가서 주변을 정돈하라고 했는데, 환자들에게 죽을 채비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자식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안에 다 하라는 것입니다.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그것은 매사를 잘 마무리해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가능한 한 줄이라는 뜻입니다.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날 저녁,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목구멍으로 통해서 위장을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고,

췌장에 바늘을 꽂아서 종양에서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현미경으로 조직세포를 본 결과 아주 드문 췌장암의 한 종류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 의사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당시 곁에 있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그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때만큼 죽음의 문전에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 일을 겪고 나니, 죽음 자체가 유용할 수 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던 시절보다

좀 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하지만 죽음은 어느 누구나 도달하는 목적지입니다.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과도 같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지요.

 

It is Life's change agent.

죽음은 '삶'의 변화물질입니다.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옛 것을 치우고,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 그 '새것'은 바로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여러분도 '옛 것'이 되고, 치워지겠죠.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낭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다른 이의 생각이 빚어낸 결과가 구속하는 삶, 즉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여러분 안의 목소리가 다른 이의 의견이 내는 소음에 익사 당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And most important thing is to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당신의 가슴과 직감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이 두 가지는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 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그 이외의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렸을 때, '지구 백과'(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굉장한 책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 바이블 중 하나였죠.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맨로팍 Menlo Park에 살던

스튜엇 브랜드 Stewart Brand 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이 책에 자신만의 시적 영감을 불어 넣었죠.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1960년 후반이었는데 퍼스널 컴퓨터나 탁상 출판이 출현하기 전이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구글이 존재하기 35년 전에 있었던, 책으로 된 구글 같은 것이었죠.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엇과 그 팀은 전체 지구 목록의 몇 가지 증보판을 냈고, 수명을 다했을 무렵, 최종판을 출판했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1970년 중반이었고, 그때 저는 지금의 여러분 나이였습니다.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최종판 뒷 쪽 커버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모험심이 넘치는 청춘이라면 그 길에서 히치 하이킹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늘 제 자신이 그러기를 소망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이제 여러분은 새 출발을 위해 졸업을 하고, 저는 여러분께 똑같은 소망을 보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에 머물라 . 바보스러움에 머물라.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첨단 IT제품들로 만들어진 스티브잡스의 모자이크

  

스티브 잡스(Steve Jobs)
  - 1955.2.25.일생(54세), 미국 샌프란시스코
  - 부인과 4명의 자녀와 살고 있음.
  - 애플의 창업자, 최고경영자(CEO)
  - NeXT, PIXAR CEO 역임
  -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의 혁신제품으로 애플사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린 천재 기업가.
  - 2007,2009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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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의 한국상륙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몇 가지를 짚어보자.

IT업계 최고의 화두는 단연 아이폰이다. 

최근 모신문 기사에 이런 글이 났었다.
'애플은 아이폰을 870만대 팔아 4조원의 이익을 남겼고,
삼성은 핸드폰을 5,000만개 팔아 1조원의 이익을 남겼다.'
잘 만든 혁신 제품 하나가 기업의 이윤에 미치는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스티브잡스의 돌출된 행동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그의 추종자로 만들어버렸다.
아이폰으로 시작된 애플의 돌풍이 지난달 말 새롭게 출시된
애플의 태블릿 PC[각주:1]'아이패드'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2010년 세계 IT시장을 겨냥해 발표한 애플의 야심작 '아이패드'
신제품 발표를 앞다투어 보도한 세계언론들의 반응을 보면 애플사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9.3인치 LED화면에 1kg도 되지 않는 무게, 와이파이(Wi-Fi)에 이은 3G기능까지... 각 언론들이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어쨌든 세기의 관심을 끌기에는 그 영향력이 실로 상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지인 중에서도 벌써 출시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으니...



그러나 정작 국내 정착을 위해서 뛰어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전문가들은 3월초에 시판되는 아이패드가 한국 시장에 맞게 변신해 들어온다고 해도 년내 도입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있다.

아이패드의 한국상륙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몇 가지를 짚어보자.


첫째, MS 일색인 한국 시장에 맞추기 쉽지 않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라서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한 나라다. 특히 IT부분은 그 상황이 더 한듯 하다. 한국은 MS의 운영체제인 윈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98%가 넘는 나라이다. 따라서 모든 인터넷 환경들이 MS 환경에 맞춰져 있어, 당장 인터넷 접속을 통한 인터넷 뱅킹, 온라인 쇼핑이 불가능하다. 정부가 자랑하는 전자정부 싸이트의 이용도 제한된다. 아이패드를 통한 전자책, 온라인 강좌 시청 등 학습용 단말기로의 기능은 충분하겠지만 MS의 엑티브X로 대표되는 인터넷 환경을 어떻게 뚤어야할지가 애플의 숙제가 될 것이다.

둘째, 아이패드는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어도비사의 플래시를 채택하지 않았다.
플래시는 웹상에서의 게임, 동영상, 애니메이션을 재생하도록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다. 이미 플래시게임 시장은 그 규모 또한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인텔의 PC환경에 최적화된 SW이기 때문에 모바일 기기에 적용할 경우 배터리 성능에 문제점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애플이 어도비의 플래시에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중이기 때문에 플래시를 의도적으로 배재시킨 거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국내 통신사의 태도는 신중할 수 밖에 없다.
KT의 아이폰 도입으로 타격을 입은 SK와 삼성은 대항마인 구글의 안드로이드폰을 앞다투어 도입, 출시할 예정이지만 3G 기능을 탑재한 아이패드의 도입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사를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아이패드의 중립적 기능(통신기기와 PC의 중간적 형태)이 과연 국내시장에서 수익창출을 할 수 있을지를 명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국내환경에 맞는 기술적 연동 부분이나 직원교육등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함을 볼 때 통신기능을 완벽히 충족하는 환경으로는 당장에 도입이 힘들 듯 하다.

넷째, 아이패드를 출시하고 나서 애플의 주가가 오히려 하락했다.
아이폰에 비해 특별한 혁신적 기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이유로 비추어보아 아이패드는 향후 IT시장의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아이패드의 신제품 발표 이후 태블릿PC와 넷북, PMP, 전자사전등으로 대표되는 IT시장의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IT업계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발전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폰의 핵심부품을 납품해 엄청난 수익을 낸 삼성이나 LG도 그저 부품조달업체로 만족하기에는 그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크다. 
컨셉트 기기의 대표주자인 코원과 아이리버등 및 국내업체들도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패드의 국내 상륙에는 시간이 소요될 듯 하지만,
한국의 애플마니아들의 성원에 어떻게 애플이
어떻게 답할지는 당분간 두고 봐야 할 듯 하다.


  1. '태블릿PC' : 기기의 스크린을 손가락이나 펜으로 터치하는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휴대형PC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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